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읽고_2020-002 진이, 지니

꽁's 꺼리

by 사랑지기 2020. 3. 17. 22:57

본문

제목 : 진이, 지니 (정유정 장편소설, 은행나무)

1판 : 1쇄 발행 2019년 5월 27일 ( 1판 12쇄 발행 2019년 6월 26일)

ISBN : 97-11-89982-14-0 03810

# 읽은 기간

2020.03.13 ~ 2020.0315

# 꽁's Pick

(에필로그 361)

민주에게

(중략)

떠나기 전에 신이 내게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해준다면, 그러니까 '다정한 그녀'의 목소리로 한마디만 말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러면 나는 내 친구의 이름을 불러볼텐데. 가만히, 입속말로,

김민주......라고

인간에 가까운 정서와 행동을 보이는 보노보라는 개체를 통해 보는 인간의 세상, 얼마나 많은 동물 그리고 환경들이 인간에 의해 무참하게 터전을 삶을 빼앗겼는지를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이었다.  나의 생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원래의 주인인 지니에게 돌려주기위한 진이의 선택은 무엇보다 인간적인 결정이 아니었을까.

정유정 작가님의 글은 언제나 쉼 없이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과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쉬는 날, 무엇을 했는지 기억도 못하는 여러날들 중 하나가 아니라, 민주와 진이 그리고 지니의 시간들과 함께 해서 행복한 소중한 날로 만들어주었다.

정유정 작가님 말처럼 ' 내 삶의 유일무이한 존재인 나 자신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 그때가 오기전까지, 치열하게 사랑하기를. 온 힘을 다해 살아기기를...'

 

워낙 좋아하는 정유정 작가님의 신작.

제목이 왜 이럴까 하는 궁금증으로 첫장을 넘겼다. 

습관처럼 목차를 훓어보아도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책장을 넘겼다.  책을 읽어가며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너무 즐거웠구나, 그리고 그들의 시간을 함께 공유받아 마치 선물을 받은것 같은 느낌을 받었다. 

언제나 믿고보는 정유정 작가님 이번 작품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책을 읽고나니, 제목 그리고 목차가 더 와닿는다. 


 

 

 


>> 내용 중 발췌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들

더보기

[프롤로그]

p.7~8

깊고 예민한 감수성, 높은 지적능력, 생동감 넘치는 몸짓, 풍부한 표정. 그 중에서도 겁 많고 수줍은 성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가까이 다가와 탐색하듯 응시하다가, 어느 순간 내 안으로 훅 미끄러져 들어오는 검은 눈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마저 잊게 했다. 그들을 향해 그들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다.  느긋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상대를 관찰하거나 입술을 오리 주둥이처럼 내밀고 접촉을 구걸하거나, 쉰 소리로 헐덕거리며 함께 웃거나.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 지상에서 이토록 매혹적인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다' 정도가 될 것이다.  흡사 개안을 한 기분이었다.  골대를 옮긴 이유로 이보다 더 타당한 것이 있을까.


침팬지와와 함께 살아온 영장류센터 사육사 진이가 침팬지에 대한 설명을 나열한 것이다.  그 깊은 검은눈 속 나는 어떤 모습일까

 

p.12

5대5 가르마가 선명한 검은 머리털, 검은 얼굴, 둥글고 작은 귀, 침팬지보다 넓은 이마, 고릴라처럼 큼직한 콧구멍, 살빛이 더 옅은 인중과 턱, 겁에 질린 나머지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당겨올린 다홍빛 입술.

보노보였다.


진이와 보노보의 만남 (인간과 가장 유사한 DNA를 가진 개체인 보노보)

침팬지, 고릴라 와는 다른 외형을 가진 보노보에 대한 설명들.

글을 통해 처음 접하는 동물이다 '보노보'. 침팬지보다 체구가 작지만 공감능력은 훨씬 뛰어나며 온순하고 쾌활한 성격, 연대와 평화를 중시하고 암컷사회를 구성

사람보다 낫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p.24 ( 1부 무곡 / 1장 민주 )

눈이 마주치자 외톨이는 허둥지둥 상자를 쑤시기 시작했다.  시선은 여전히 내게 붙어 있었다.  눈동자와 눈자위가 온통 검었으나 시선의 방향과 눈빛의 의미가 명쾌하게 읽혔다.  몹시 궁금한 기색이었다.  저 구지레한 생물은 저기 앉아 뭘 하고 있나.  나도 궁금했다.  내가 여기서 뭘하고 있는지.


민주가 외톨이 침팬지와 만나 느낀 상황들.  민주의 생각이 그대로 투영되어 느낌을 받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런 민주의 모습에 내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지금 이 생에,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p.35

짐작이지만, 나는 아저씨와 같은 코스를 밟아 이곳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아저씨가 그랬듯, 나도 갈 곳을 찾지 못한 자가 필연적으로 도착하는 곳에 이른 것이다.  내가 앉아있는 곳은 골짜기 밑바닥이 아니라 삶의 밑바닥이었다.  흔히들 종착역이라 부르는 벼랑 끝이었다.  발을 떼버릴것인지, 발길을 돌릴 것지 결정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갈 곳을 찾지 못한자가 도착하는 곳, 참담과 암담 사이 그 어디에도 희망이라는 빛줄기가 비춰지지 않는 곳, 그 곳에서 감히 누가 의지를 찾아 나설 수 있을까

 

p.47

나는 다시 아버지의 기념비적인 배낭을 꺼냈다.  몇가지 질문들이 짐을 싸게 만들었다.  세상 어딘가에 고시원 밖의 삶이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 있지 않을까.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면 그 삶을 찾을 수 도 있지 않을까.


'나로 존재하는 시간', 사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어떻게 해야 그런 시간을 찾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이도 없고, 경험도 없고 방법도 모르겠다.  고민을 해보지 않아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나에게는 필요한 시간일 텐데.  인생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생의 일부를 바쳐 알아내야하는 생존 목적 중 반드시 하나인 것처럼 찾아 다니게 되고 찾고 싶다는 욕심을 가져보게 된다. 

 

p.103 (1부 무곡 / 2장 진이, 지니)

검은 눈동동자, 암갈색 눈자위, 유순해 보이는 둥근 눈매, 사고의 마지막 봤던 그 눈이었다.  동공이 활작 열린 지니의 눈이었다.  나는 초질량 블랙홀에 걸려든 소행성처럼 지니의 동굴 속으로 순신간에 끌려들어갔다.  빨아들이는 힘이 너무도 무지막지해서 현기증이 일고 멀미가 났다.  의식마저 납작하게 뭉개졌다.

어둠이 몰려온다.


사고 직전 지니를 살피던 진이, 사고 현장에 그 둘은 없었다. 

진이의 의식이 전해주는 상황들.  주변상황 그리고 본의 상태를 설명해주는 그녀의 행동이 다르게 느껴진다.  그녀도 상식적으로 이해불가하다 했지만 잠시 인지장애 같은 오류라고 생각했다.  진이가 지니를 만나는 순간부터 쉴새없이 넘어간 책장들. 나는 진이와 함께 지니의 세상을 함께 여행하고 있다.

 

p.125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눈, 일그러지는 입술, 짧은 머리칼, 부서지는 차창, 갈라지는 이마, 얼굴을 뒤덮은 선혈. 꿈속의 나나는 주체자가 아니였다. 피사체였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사고의 순간, 내가 뭔가를 볼 수 있었다면 그건 지니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꿈에서는 본 적도, 볼 수도 없었던 내 얼굴이 나타났을까.


꿈을 꾸는 주체는 얼굴을 확인하지 않는다. 주체임을 인지하므로.  처음에는 당연하게 인식했지만 두번째는 다름을 생각하게 된다. 

 

p.126

필연적인 질문이 뒤따라왔다.  '진이의 몸'은 어디에 있는가. '지니의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앉아 질문을 던지고 있는 존재가 지니의 몸에 깃든 진이의 정신이라면, 나는 지니인가 진이인가.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가.  아니라면 이것은 꿈인가? 상상인가?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된 진이.  지니의 몸과 의식 속에 있는 나의 의식을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진이에게는 혼란이 생기고, 나에겐 생각이 생긴다.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p.141 (2부 램프 / 5장 민주)

일잔 정자에서 나가야겠지.  이 골짜기가 자살을 꿈꾸는 자의 무지개다리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 살겠다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박령 소굴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내려오지 않았다면 지난밤 교통사고를 목격하지도 않았으리라.  딱 한번, 그것도 아주 잠깐 마주친 다정한 그녀 때문에 잠을 설치지도 않았을 테고.


민주와 진이의 첫 맛남.  다정한 그녀 진이는 민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삶의 의미를 내려놓은 민주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는 기회가 되길...

 

p.155

나는 고개를 들어 놈을 봤다.  젖은 돌처럼 반들반들하고 까만 눈이 내 눈을 포박해왔다.  그 눈에는 상대의 숨을 죽이게 만드는 무언가 있었다.  무언가의 존재가 너무도 명백해서 내가 정신 나간 놈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것은 동물의 눈이 아니었다.  서른한 해를 살아오면면서 수없이 마주쳐온 눈, 감정이 담긴 '인간의 눈'이었다.  절박하게 답을 원하는 눈이었다.  자기 모습이 상대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문제가 보노보에겐 목숨만큼이나 중차대한 문제인 모양이었다.  나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민주와 진이 아니 지니의 만남.  민주는 다정한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지는 민주에ㅔ 본인이 진이 임을 확인시킬 수 있을까.

속내가 비춰지지 않는 또는 속내를 비춰주지 않는 사람의 속내를 간절히 바라고, 자세히 살피면 알 수 있는 것인가

 

p.165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입이 어찌나 크게 벌어지는지, 눈은 또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마치 나에게 홀딱 반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몸서리치며 모자를 눌러썼다.  차용증은 야상 주머니에 담았다.  휴대전화는 다른 쪽 주머니에 담았다.  나머지 잡동사니는 침낭 안에모조리 쓸어 담아서 정자 밑으로 밀어넣었다.  그 사이 그녀는 배낭에 들어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진이를 도와주기로 한 민주.  둘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녀를 믿어주는 민주와 함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p.171 (6장 진이,지니)

 마지못한 어조요,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절어도 절반은 진실로 들렸다.  전날 오후, 그를 처음 만난 순간을 돌이키자 그렇다는 확신이 왔다.  깡마른 몸, 창백한 낯빛, 아무 생각도 없어보이는 눈.

그는 너무나 눈에 띄지 않아서 오히려 눈에 띄는 타입이었다.  어떤 자리에 가나 하나쯤 있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도 보지않고, 그저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  허기 때문에 퍼져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망아의 골짜기에서 재회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지만.


진이가 본 민주의 모습.  졸업 후 빛나던 청준을 좌절과 방황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p.173

의심을 질문으로 질보 전진했다.  내가 지니의 온전한 심리적 존재라면 습성과 본성도 내 방식대로 발현되어야 맞았다.  비록 태생적 다혈질이기는 하나, 나는 21세기에 걸맞도록 사회하된 문명인이었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그런 식의 포악질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낯선 무언가는 몸 안에서 잠자던 지니의 야성이 아닐까.  다급할 때, 위기에 처했을 대, 혹은 감정이 격발될 때 내 이성을 누르고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지니 안의 진이는 이성을 누르고 튀어나온다면, 아직까진 온전한 진이였으나 이 상황이 역전된다면 앞으로의 상황은 예측할 수 없다.

 

p.181-182

눈을 떴을 때, 나는 무 위에 있었다.  골짜기의 팽나무 위에서 깨어나기 전 꿈속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내 얼굴을 3인칭 시점으로 봤던 그 이상한 꿈속으로, 그 때와 같이 손가락 하나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시선의 움직임도 제한돼 있었다.   지니의 시선이 닿는 곳, 지니의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었다.

(중략)

나는 원래의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니 이곳은 어디일가.  현실은 분명 아니었다.  지니의 머리속 어느 차원이겠지.  좀 전에 던진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봤다.  지니의 머릿속 층 위에서 이 세곅계가 위치하는 곳은 어디인가.  꿈일까, 기억일까, 무의식의 심연일까.  아니면 상상속 세계일까.


진이는 지니의 기억 어딘가 쯤을 지니의 눈을 통해 함께 보고 있는 것 같다.  지니가 느끼는 촉감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 머무르는 것들.

지니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p.184

나는 지니의 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 없없었다.  사지나 몸통의 일부만 순간순간 시야로 뛰어들어왔다.  근육의 움직임도 인지하지 못했다.  귀뺨을 스쳐가는 풍경들의 속도감으로 점점 빨리 내닫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뿐.  이 경우, 내 위치는 주인공 시점이라는 이름을 갖지 않을 것이다.  굳이 정의하자면 주인공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파리의 시점이었다. 

시점이 선명해지자 나머지도 선명해졌다.  의심했던 대로, 나는 지니의 유일한 심리적 존재가 아니었다.  지니의 자리를 대체한 것도 아니었다. 지니의 자리를 대체한 것도 아니었다.  나와 지니는 하나의 몸에 혼재하는 두 개의 영혼이었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나는 침입자였다.


침입자 진이가 스스로의 존재(위치)를 확인하는 순간.

주인공 머리 위의 파리, 의직지가 전해지지 모못하며 생각을 공유하지 못하는 오롯이 지니의 행동 일부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자그마한 존재인 것이다.

 

p.199 (제7장 민주)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다다정한 그녀의 눈은 35년이라는 생물학적 시간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눈이었다.  삶에 단련된 자 특유의 무덤덤한 눈이었다.  나로서는 일흔살이 돼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한 눈이었다.  다정한 그녀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건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강철처럼 검푸르던 그 눈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자 등허리 밑으로 이상한 한기가 퍼졌다.  해병대 할아버지를 발견핼 때 느낀 한기, 고갯길 위에서 그녀의 스승이 정신을 놔버렸을 때 느꼈던 그 한기.


다친 진희의 모습을 본 민주.  다정한 그녀의 눈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정한 그녀가 민주의 삶에 강인함을 불어넣어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사항을 함께 적어본다.

다정한 그녀가 민주에게 희망과 삶의 의지를 주듯, 책을 읽는 나에게도 주어진 삶은 살아야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게 해준다.

 

P.247

동네 주민들은 달이 기울기 시작할 무렵에야 하나둘 흩어졌다.  지니는 소리죽여 나무로 올라갔다.  어미의 잠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았다.  가지에 발을 걸고, 몸을 거구로 늘어드린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작고 까만 털 뭉치 같은 것이 어미의 품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지니의 입 안에서 운음 같은 소리가 구르기 시작했다.  제 동생에게 건네는 환영 인사 같기도 했다.

까꿍.


지니의 과거 속에서 동새을 만나던 날, 수줍게 환영인사를 건네는 지니의 가감격까지 고스란이 진이에게 전해진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반가움이 느껴진다.

 

p.249 (제9장 민주)

비를 얼마나 맞은 것일까.  물길에 들어가 헤엄이라도 친 것처럼 온몸이 홀딱 젖어 있었다.  그 바람에 털이 살갖에 찰싹 들러붙어 체구가 반쪽이 되었다.  검은 얼굴에선 빗물이 줄줄 흐르고, 발을 디디는 곳마다 물자국들이 찍혔다.  시선은 내 얼굴에 대못처럼 붙박여 있었다.  복잡하고도 미묘한 눈빛이었다.  긴장한 것도 같고, 수줍어 하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았다.  동공이 열린 눈동자는 꿈을 구는 것 처럼 몽롱해 보였다.


민주는 지니가 꿈속을 거니는 그녀의 모습을 봤다.  동생을 만나 마냥 행복한 지니.  

 

p.265

짐작이 맞다면, 둘은 어느 쪽도 온전히 살아 있거나 죽지 않은 상태였다.  둘 다 산자와 죽은 자의 국경을 배회하고 있었다.  한쪽은 죽음의 손에 몸이 붙들렸고, 한쪽은 정신이 무의식의 그물에 갇혔다.  자력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세계에 같혔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처지였다.  지지리 재수없는 급행열차를 탔다는 점에서 같은 운명이었다.  삶의 안전핀이 빠진진 사상태라는 점에서 똑같이 위험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포악한 욕망에 지니는 무리의 삶에서 벗어나 혼돈의 세계로 왔다.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잃어야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p.271

안다.  멈춰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일단 시작하면 돌이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비루하나마 사회적 궤도안을 맴돌던 내 살밍 완전히 전복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런런데도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울리는 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가증폭적인 소리였다. 

하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후회 할거야.


자기 안의 껍질을 깨려는 민주.  스스로 가둬버린 알을 개고 나오면 새로운 경험들이 삶을 영위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주지 않을까

 

p.272

알다마다.  보노보노를 훔처리 가는 길이지.  약간 있어보이게 말하자면 진이의 충성분자가 되겠다는 거고.  나는 딱 한번 만난 다정한 그녀의 얼굴을 떠올올려렸다.  제인과 마주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 내어 웃던 모습이 눈 앞을 스쳐갔다.

나는 출발했다.  밤바람을 타고, 다정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


민주의 결심 그리고 도전. 두 사람이 웃으며 재회하길 소망해본다.

 

p.326  (제3부 인동호 / 11장 민주)

 그녀는 고개를 삐딱하게 틀고 팔장을 꼈다 

(중략)

사실은 랜턴 따위를 물어보려던게 아니었다.  '다정정한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녀의 바람대로, 자신에게 돌아갈 방법을 찾았는지.  돌아가면, 본래대로 환원될 수 있다는 확인을 얻었는지.

끝까지 하지 못한 건, 머리속에 저주처럼 휘도는 불안때문이었다.  수전한 내 입장에서의 불안이었다.  정반대의 이야기를 듣게 될까봐.  예감하고 있는 어떤 일을 사실로 확인하게 될까봐, 듣고나면 그녀의 선택에 관여하는 말을 하게 될까봐.  우리가 타인이며, 내겐 그럴 권리가 없다는 걸 잊어버릴까봐.


진이에 대한 민주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 불안함을 생각한 것이 현실이 되지않길 바라는 그 마음이...

 

p.341 (12장 진이, 지니)

지끔껏 나를 버티게 한 건 희망이었다  내 앞에 길이 있으며, 그 길은 삶을 향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와 지니는 본래 자리를 되찾을 것이라 믿었다. 

내 몸이 지금껏 살아있는 건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내 몸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다고 우겼다.  그 많은 단서와 정황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데도...


지니의 몸에서 본인의 몸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들은 다른 방향의 답을 가르키고 있다.

 

p.344

뭔가를 생각할 수 있게된 건 램프에 불려온 후 부터였다.  지니의 시점이 된 후에야 비로소, 내가 아닌 지니를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에 의해 인간들 속으로 끌려 나온 후, 인간으로 인해 생사의 길목을 넘나들고 인간을 위한 쾌락의 도구가 되었다가 인간에게 자신을 통째로 강탈당해 버린 지니의 삶을, 지니 자신으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정글에서 이곳까지 오게된 지니의 시간들을 알게 된 진이.  그녀의 마음은 지니를 통해 본 세상을 보며 결심을 하게 되었다.

 

p.355

나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맞붙이고, 마지막 순간에 손을 빼저리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순간, 내 몸이 꿈틀 움직이며 손을 맞잡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현기증이 나고, 불빛이 사라지고, 방안 사물들이 소용돌이 치듯 휘돌았다.  병실바닥이 발 밑에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커튼이 닫히듯, 시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윽고 완전히 닫혔다.

어둠이 찾아왔다.


병실의 진이와 지니가 만나는 순간, 진이가 온전히 평안을 찾기를...

 

p.381 (에필로그) 

민주에게

뻔뻔하고 염치없는 얘를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결국 채무이행을 못하게 되었다고 방법이 없었었어.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마저 하지 못했어.  하나 마나 한 생각만 자꾸 떠올랐어.  떠나기 전에 신이 내게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준다면, 그러니까 '다정한 그녀'의 목소리로 한마디만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그러면 나는 내 친구의 이름을 불러볼텐데, 가만히, 입속말로

김민주...라고

추신 : 나와 지니는 오래오래 너를 기억할꺼야. 네 형편없는 노래도.


다정한 그녀가 핸드폰 속에 남겨둔 민주에게 남긴 다정한 안녕 인사

 

p.366

순간, 사원증에 정신이 팔려있던 지니가 멈칫했다.  머뭇머뭇 제 손을 들어올리더니, 검지를 길게 펴고 내 손과 제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잠시 후 엄지를 세워 손가락 총을 만들었다.  이제 기억이 난다는 듯 나를 향해 검지를 까딱거렸다.  한 번, 두 번. 나는 멍하니 서서 모차르트 전하는 말을 들었다.

'안녕. 민주'


지니 속 어딘가 진이가 민주에 남긴 마지막 인사였다.  안녕..

 

p.367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란느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은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 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삶이 나에게 내려준 운명.. 살아야 한다는 것..

 

관련글 더보기